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월 항쟁 (문단 편집) === 6월 10일, 본격적인 항쟁의 시작 === > '''6•10 대회 결의문(1987.6.10.)''' > >첫째, 이 땅에서 권력에 의한 고문, 테러, 불법 연행, 불법 연금 등 여하한 인권 유린도 영원히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국민적 요구이다. > >셋째, 정치 군부 세력의 몇몇 핵심자들끼리 독재 권력을 무슨 사유물인 것처럼 주고받으려는 음모에서 비롯된 이른바 4.13 호헌 성명이 무효임을 선언하며, •••••• 범국민적 운동을 더 한층 가열할 것임을 결의한다. >---- >-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 6월 10일에는 "국민운동본부"가 주관하는 대규모 시위가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렸다. 이 시위에는 학생만이 아니라 당시 30대 [[화이트칼라]] 직장인들, 속칭 "넥타이부대"가 대거 참여하였다. 다수의 시민이 참여한 것은 박종철, 이한열의 사망과 같은 인권유린 사건이 그들의 정치의식을 크게 자극하였기 때문이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4.19 혁명]]을 접해본 세대이다.] 이에 정부는 집회를 봉쇄하기 위해 별짓을 다 했다. 12시에 선언문 발표가 예정된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을 수일 전부터 봉쇄했으며, 당일 차량 경적시위에 동참할 것을 우려해 "경적을 울리는 모든 차량운전자는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잡아넣겠다"고 뉴스를 통해 으름장을 놓았으며 서울 시내버스와 택시의 경적을 제거했다. 또한 수도권 전철은 시내 구간을 무정차 통과했으며, 단축 수업, 조기 퇴근 등 수많은 조치가 나왔다. 또 봉쇄된 곳도 미리 또는 담을 넘어 어찌어찌 진입한 사람들에 의해 12시에 사전 집회를 개최했으나, 경찰의 원천 봉쇄로 국본의 간부들이 체포되었고 집회도 확산되진 못할 것으로 보였다. [[스트라이샌드 효과|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후일담에 보면 이러한 조치 때문에 도리어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 봉쇄되자 학생들 사이에서는 당일 12시 명동으로 모이라는 전언이 있었고, 12시 조금 넘은 시간에 이 학생들을 중심으로 명동제일백화점 (현재 명동 영플라자, [[서일본 철도|솔라리아니시테츠호텔]]) 앞에서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1987년 신동아 7월호 참고) 1000여 명 이상이 운집한 집회를 해산시키려 경찰이 진압을 시도했지만 시민들은 주동자를 보호하며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고, 늦은 시간까지 집회를 계속하였다. 제일백화점 앞으로 복귀하지 못한 시민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유사한 성격의 작은 집회를 만들어 냈다. 명동 성당에서 롯데백화점 일대에는 시위집회 참여 인원이 점점 늘어났다. 여기에는 경찰의 원천봉쇄조치가 한몫했다. 직장인 입장에서는 회사는 조기 퇴근으로 일찍 끝났는데, 지하철 무정차로 집은 못 가고, [[서머타임]]으로 인해 날은 밝으니 자연스레 시위대에 합세할 환경이 갖춰진 것. 당시 시대 상을 그린 만화 <100℃>에서는 조기 퇴근한 직장인들이 "이거 시위에 참가하라는 국가의 명령이겠지?"하고 집회를 막으려고 애쓰는 정부의 멍청한 대응을 비웃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6월 10일 저녁 6시, 서울시내 곳곳에서 집회가 일어난다. 국본의 방침대로 저녁 6시에 [[서울주교좌성당]] 저녁 만도 종소리를 필두로 하여 차량 경적을 신호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 경찰이 시위대들을 보이는 대로 체포하는 가운데 일부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피신하면서 소위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시작되었다. 시위가 '''이미 5월 이전부터 진행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6.10 항쟁', '6월 항쟁'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건당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 내용을 [[https://imnews.imbc.com/replay/1987/nwdesk/2175193_29503.html|MBC 뉴스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땡전뉴스]]였던 당시 사정상 제1헤드라인이 [[민주정의당|민정당]] 전당대회 소식이고 이를 10분 넘게 보도하고 있다. 시위 소식은 3~4 꼭지 뒤에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서울 시내 몇몇 곳에서 소요가 있었지만 큰 충돌 없이 끝났습니다."]] 라고 언급한다. [[KBS 9시 뉴스]] 역시 내용은 [[https://mn.kbs.co.kr/news/view.do?ncd=3673548|마찬가지였다.]] 한편, 이 시기는 제16회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가 한창 진행되었던 시기였다. [[경상남도]] [[마산시]]에 있는 [[창원 NC 파크|마산종합운동장]]에서 이날 오후에 [[태국]]과 [[헝가리]] 축구대표팀 간의 경기를 한 뒤, 이어서 열린 한국 A팀과 [[이집트]] 간의 경기가 치러졌는데 경기 도중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쏜 [[최루탄]] 연기가 경기장으로 날아들었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산발적인 시위가 매우 많이 일어났기에 최루탄에 익숙했던 한국 선수들과 관중들은 큰 동요가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집트 선수 중 다수가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그 사이에 한국 선수들이 골을 넣었기는 했지만 이집트 선수들이 지속적으로 이상을 보이자 한국 선수들과 관중들도 웅성웅성거렸고 결국 주심은 해당 경기를 재개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몰수게임|몰수무]]를 선언하며 경기를 종료시켰고, 이 장면은 KBS 1TV를 통해서 갑자기 방송이 끊기는 초대형 [[방송사고]]까지 겹쳐 '''[[https://youtu.be/Lx6g4Mpf-QE|전국적으로 생중계되었다.]]'''[* 지금이야 잊혀진 경기가 되었지만 당시 대통령배는 아시아에서 그나마 규모가 좀 되는 국제경기였다. 지금으로 치면 아시안게임이나 FIFA 공인 A매치 토너먼트가 벌어지는 경기장 바로 옆에서 독재정권이 최루탄을 쏴재끼는 초대형 [[나라 망신]]을 전국에 생중계한 것. 이 때문에 TV를 보던 마산시민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바깥으로 나왔을 것이라는 게 자료 뉴스에서의 내용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경기가 끝나자 경기 전에 '''강제로 표를 사야 했던'''[* 위에서 언급했듯이 어느정도 규모있는 국제경기인데 관중석이 비어있는 건 윗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직장에서 강제로 참석하게 시키거나 협회에서 사람들을 보내는 식으로 해서 관중석을 채우곤 했는데, 당연하게도 '''푯값은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 계산했다'''.] [[마산아재#s-2.2.6|마산 관중들이 표 환불을 요구하며 주최 측에 대거 항의하다가, 표 환불이 받아 들여지지 않자 시위대에 합세하며]] 심야 시간까지 시위를 벌였고 전두환의 사진은 불탔다. 이 소식은 다음 날에 주요 언론들을 통해 짤막히 보도되면서 대중들에게 시위가 심상치 않다는 점을 널리 알린 셈이 되었던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